INDEX
INTRO
01. 유년시절
02. 망치를 들다
03. 영국의 길: 또 다른 나
04. 그냥 형체를 만들다
05. 작가의 길
06. 금속과 은의 매력
07. 단순한 반복
08. 작가의 생각
OUTRO
INTRO
금속 작가라는 명칭으로 불리우기 전에 금속을 다루는 사람을 우리는 대장장이, 영어로는 사람 이름이기도 한 Smith라는 명칭으로 불리었다.
용도에 따라 smith 앞에 Black(말굽,무기), Gold(금), Silver(은), Sword(칼) 등의 단어를 붙여 보다 전문화했다.
대장장이는 고대로부터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일상의 생존을 담당하는 농기구를, 목숨의 승패를 담당하는 무기를 만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하다는 것은 때로는 슬픔을 안고 있기도 했다. 그 존재 가치만큼 전쟁 시 그들은 적과 상관없이 차출 대상 1호였다.
숨기기도 쉽지 않았던 게 손은 거칠고 손톱에 철 녹이 스며 있어 쉽게 구분되었고 그런 기술자가 도망가지 못하게 발을 잘라 옆에 두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자들이기에 사람들 눈에는 마치 마술사와 같았으며 지역에 따라
샤먼(주술사)보다 높고 강한 존재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런 주술적인 이미지 때문인가?
유럽에서 간혹 심심치 않게 말편자가 달린 차를 볼 수 있다. 대장장이들이 큰 망치로 내리치는 강한 모습과 쇠를 때리는 소리에
악마나 귀신이 도망간다는 미신 때문이다. 그래서 대장장이가 만드는 말편자가 행운을 가져다 주고 악마를 쫓는 힘이 있다 하여 차나 문지방에 걸어 놓는다고 한다.
대장장이이자, Silversmith인 이상협작가는 망치 하나로 어떠한 마술을 부릴까. 그 마술을 위한 그의 생각과 마음가짐이 궁금하다.
01. 작가의 유년시절
작가님의 유년시절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70년대의 여느 남자아이처럼 깡통이나, 딱지, 구슬치기 등으로 평범하게 놀았다. 금속과의 인연은 여기서 부턴가(웃음). 공부 빼고 다 좋아했다.
어렸을 때는 열이 많고 허약한 체질이라 보약을 많이 먹었고 그 덕에 운동도 많이 하고 태권도도 했었는데 곧 잘 했다.
02. 망치를 들다
금속공예는 어떠한 배경에서 시작되었는가?
공부를 안 해서 공고를 갔다 (웃음). 머리보다는 몸으로 더 잘 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귀금속 가공(쥬얼리)을 하였는데 보통, 반지나 목걸이를 만들곤 했다.
고3 여름방학쯤 되면 대부분 취업전선에 뛰어드는데 나 또한 선배를 통해 명동의 귀금속 샵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금은 종로3가가 나름 귀금속의 메카이지만 당시에는 명동이 그랬다.
이 경험을 통해 흥미가 달라졌다.
금속은 주로 쥬얼리나 작은 장신구를 다루는 일을 세공(細工)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몸에 붙이는 귀걸이, 반지, 목걸이, 팔찌에서 옷의 장신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반면에 오브제를 다루는 것을 대공(大工)이라고 하며
테이블웨어에 해당하는 그릇, 잔, 설탕통에서 가구나 건축 부속물로까지 확대된다.
하나는 작은 것, 또 다른 하나는 큰 것을. 이렇게 이해해도 무방하다.
작은 것에서 큰걸 하고 싶은 흥미가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대공일을 하고 싶다고, 큰거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방배동에 있는 실버웨어샵을 추천해주셨다.
여기서 나는 스승을 만나고 본격적인 망치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03. 영국의 길: 또 다른 나
영국은 어떠한 계기로 가게 되었는가?
군대를 전역하고 방배동 실버웨어샵에서 다시 3개월정도 일을 하다 잠시 휴식기간을 갖고 방황 아닌 방황을 하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곰곰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는 와중에 친형이 ‘워킹홀리데이’라는 것을 추천해줬다.
당시, 작업실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모으던 중이었는데 해외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 바로 결정하고 갔다.
시작은 이런 것이었다.
어학원 특화지역이자 휴양지이기도 한 Bournemouth (본머스)에서 어학을 시작했는데 가자마자 몇 달 되지도 않고 IMF가 터졌다.
당시 1,450원이던 환율이 4,000원까지 뛰다 보니 아마 80% 정도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것 같다.
나머지 20%에 해당된다면 왜 영국에 남았고 어떻게 지냈었나?
일단 ‘엄카’를 썼다 (웃음). 나라고 별 수 있나? 그런데 묘하게 오기가 생겼다. 왠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척들 말 듣기가 싫었다. 왜 그런거 있지 않은가? “내 그럴 줄 알았다”와 같은 말과 눈빛. 이러한 배경도 강하게 작용했던 것 같다.
우선은 아르바이트하면서 생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벼운 술 이외에는 돈을 잘 쓰지 않았기에 버틸만 했다.
새벽에는 본머스 법원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로 시작하고.
공부와 생활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공부는 어떻게 하였는가?
영어를 보니깐 일단 문법이고 뭐고 간에 단어를 알아야 듣거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단어 외우기에 집중했다.
그리고 간혹 개인 레슨도 가볍게 받으면서…처음에는 대학에 크게 뜻이 있지는 않았다.
04. 그냥 형체를 만든다
작가님 작품은 공예와 조소의 경계가 모호하다. 이 말의 또 다른 표현은 경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작품크기의 확장과 ‘곰리’의 영향이 있었는가?
영향이 없지 않았겠지만 입체적 형태가 좋았다. 생각을 표현하고 싶을 때 자연스럽게 입체적인 구성을 염두 해 두는걸 보면 3D적인 접근인 것 같다.
입체적인 형체는 많은 부분 기술이 필요하게 되는데 대부분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되는 쪽으로 생각하며 제작과정에 눈을 뜨게 된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이런 형태가 나올까? 이 과정에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 비용인가? 시간인가 등의 생각을 하면서
손도 손이지만 머리에서 형태를 만들었던 것 같다.
지금도 금속과 상관 없더라도 입체적 형체이면 제작과정을 상상한다.
솔직히 나를 작가, 조각가, 공예가 등 무엇으로 불러도 상관 없다.
그냥 하다 보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고 그게 금속이라는 소재일뿐. 그저 생각하는걸 입체적으로 만들뿐이다.
그 과정을 걸쳐, 지금은 은으로 기(器)를 만드시는 거 같다. 어떻게 하여 이러한 맥락을 갖게 되었는가?
영국에서 어느 날,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서양에서 동양인이라는 입장, 그리고 한국인으로써. 그러는 과정에서 항아리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단순하지만 그 형체에서 지니는 미묘하고도 중독성이 있는 선. 미묘한 포만감을 느꼈다.
항아리하면 도자기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는데, 그것을 은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금속 한판을 때리며 움직이며(금속이 밀리며) 입체의 형태로 만드는 금속의 물성으로 말이다.
05. 작가의 길
어떻게 하여 작가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는가?
그저 막연하게 이 일을 할 것 같았다.
초창기 작업은 주로 구리로 작업을 하였는데 메이커페어(Maker Faire) 에도 몇 번 참여했었다.
재미 있는 것은 페어에 수 만 명이 오는 것 같아도 2,3년쯤되니 작업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매번 오는 사람들이다.
작업에 대해 물어보고 관심을 보이다가도 구매는 하지 않고…그렇게 3년차가 되던 해에 인사도 하게 되면서 작은 것부터 조금씩 판매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에게 구리라는 소재는 농기구 등 하찮은 소재라는 인식이 무의식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우연한 기회에 아는 지인으로부터 은판을 받게 되어 아주 작은 은작품을 만들고 그게 모두 완판이 되었다.
아마 이때부터 은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던 것 같다. 그들에게 은(silver)은 귀족의 소재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작가로서 영국의 환경이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한국은 보통 필요한 것을 만든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만드는 것은 그냥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공예든, 조소든 만드는 것은 필요에 의한 것보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필요는 어떤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나중에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보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걸 만들고 던질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되었다.
06. 금속과 은의 매력
구리든, 은이든, 금이든 금속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금속은 정직하고 착하다. 실수를 봐준다고나 할까. 다시 고칠 수 있기에 A/S가 된다.
현재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은(銀)의 매력은 무엇인가?
구리에서 은으로 넘어간 이유는 소비자의 구매력이란 부분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구리 알러지와 공정 과정에 있었다.
구리 작업의 시간이 많아질수록 몸에 반응이 일어나더라.
재채기도 많이 하고. 그리고 은도 산처리를 하지만 구리처럼은 아니다.
은가루는 재채기도 없고 괜찮았다.
조선시대 가락지 반지를 주로 은으로 사용 했었는데 그 이유는 건강 체크의 이유가 컸다고 한다.
그래서 반지를 친정에서 준비하여 신부한테 줬다. 건강 체크용으로. 몸의 독성이나 상태가 안 좋아지면 은이 반응을 했기 때문이다.
또 은은 병균을 막아주고 살균 효과의 기능도 있다. 동도 그러한 기능이 있지만 동은 동시에 동독이 있지만 은은 없다.
우리가 은(銀)을 아는 듯 하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은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줄 수 있는가?
은 제품을 자세히 보면 925, 925 silver, sv925라는 각인을 볼 수 있다.
이는 스터링실버(sterling silver)라는 의미이며 정은(正銀)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해 은의 함량이 92.5%라는 의미이다.
100%의 순은은 강도가 세지 않아 무르기 때문에 형태가 변형된다.
이에 92.5%의 순은과 7.5%의 다른 금속 (대체로 구리)을 혼합하여 무르지 않게 강도를 강하게 하여
형태를 잘 유지하기 위해 영국에서 인증한 수치이다 (미국은 90%의 은함량).
역사적으로는 13세기의 영국에서 고품질의 은동전 생산을 위한 정제 및 합금 기술 개발에서 기준이 됐다고 한다.
그러한 은을 잘 관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 사용해라. 은제품은 대체로 실용기다.
실용기라는 것은 계속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공기마찰이 많아 사용하지 않으면 색이 변색된다.
앞서 은의 건강체크신호기라고 말씀드렸다시피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물질이다.
그래서 집안이 지저분하면 변질의 속도도 빨라진다. 청소를 하라 (웃음).
07. 단순한 반복
“동일한 힘과 반복의 연속이 숙련이다.”
“새로움은 지루한 반복에 기반한다.”
작업실을 보면 수 많은 도구들이 있다. 작업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냥 망치로 친다 (웃음). 평평한 은판을 오른손은 망치질을, 왼손은 판을 조금씩 돌리면서 형태를 만들어간다.
간단하게 말해 왼손은 만들고 오른손은 친다. 매우 단순하다.
그 단순함 속에 숙련이 숨어 있다.
그래서 일정한 힘을 규칙적으로 줘야 한다. 너무나 단순해서 얼핏 쉬울 것 같지만 동일한 힘을 오랜 시간을 두어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
지금도 작업을 할 때는 식사를 많이 하지 않는다.
밥을 많이 먹으면 힘이 생겨 힘의 강도가 달라져서 작업을 할 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망치질의 내면을 보면 미세한 힘 조절을 칠 때마다 하고 있고, 돌리는 손은 미세하게 각도를 잡아주며 디테일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봐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해봐야 아는 것이다.
그래서 대공의 기술은 치는 게 기술이다.
금속이란 게 딱딱해서 잘 변형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을 것 같아도 ‘깎는 금속’과 ‘때리는 금속’의 조직은 다르다.
때리는 과정에서 금속이 눌러 퍼지고 또 그 과정에서 다른 금속들과 정교하게 혼합되어 내구성은 강해지고 조직이 달라져서 독성이 없어진다.
구리의 합금인 유기(놋그릇)가 대표적인 예다.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함이 오히려 어렵게 느껴진다.
처음 작업을 할 때 스승님이 나에게 “잘하고 싶어? 그럼 많이 때려”라고 해주셨다.
작업을 하면서 많이 느낀다. 이 작업은 원초적 노동이라 오롯이 숙련만이 답이고 그 답의 해답은 많이 치는 것이다.
그 경험을 통해 금속 작업을 하고 싶은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
세공이 아닌 이상 큰 작업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금속공예는 체력고갈이 빠른 편이라 작가의 생명이 길지 않다.
대체로 50에서 60의 나이면 해가 거듭할수록 작업이 작아지고 디테일도 떨어진다. 도자기와는 다르다.
지금 하고 있는 은 작업이 11Kg에 육박한데 아무리 힘이 좋은 나라도 하루에 5시간 안팎으로 밖에 작업을 못한다.
그리고 일단 큰 작업을 몸에 익히면 조형물을 알 수 있다.
08. 작가의 생각
“공개와 경쟁이 발전이다.”
작업 혹은 작가로써 어떠한 영향과 영감을 생성하는가?
기술은 공개와 경쟁을 통해 발전한다고 본다.
영국에서 배운 몇 가지 중, 기술을 모두 공개한다는 것이다.
눈치만 있으면 이 기술공개를 통해 공정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자신만의 기술은 나만의 정체성이자 생존에 필수 요소라는 인식이 있어서 공개를 잘 안 하는 편인데 말이다.
그런데 이 기술을 공개하는 이면은 결국 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시간과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즉 아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사이에서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발전이란 게 어느 정도 비슷한 실력의 사람들끼리 경쟁을 해야 한다는 자신감 또한 깔려 있는 것 같다.
독보는 쇠퇴라는 인식. 결국 실력과 정체성은 많이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는 것.
OUTRO
우리는 흔히 어디에 소속되어 그 소속의 이름 하에 불린다. 대리님, 차장님, 선생님, 디자이너, 작가님과 같이 말이다.
세공에서 대공으로, 공예에서 조소로, 구리에서 은으로. 계속 확장되고 있는 이상협작가를 보며 앞에 타이틀이 무색하게 그냥 이상협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무엇으로 불리어도 상관 없다던 그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두들길 뿐, 우리가 호칭으로 정의하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정작 그는 금속공예가든, 실버스미스든, 대공인이든, 조각가든 단지 그의 말따라 만들고 싶은걸 만들 뿐이다.
“나는 시대의 유추를 담고 싶다. 즉, 내 이야기. ‘내 것은 이런거야’ 라는 뭐 그런거” 라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그냥 이상협이 만든걸 즐기고 보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