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솔루나에서 김준용 작가 인터뷰가 있던 날은 마침, 2019 독일 IHM (Internationale Handwerksmesse)의 ‘모던 마스터즈’ (Meister der Moderne) 전시회에서 독일 바이에른 주 정부(Bavarian State Government)가 응용미술과 디자인의 발전에 뛰어난 공헌을 한 김준용 작가에게 수여하는 금메달과 상장을 전달하기 위해 그가 재직하고 있는 청주대학교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기쁜 소식을 처음 전하던 날, 그는 통상적인 교수의 위엄도, 작가의 냉철함도 아닌 아이처럼 감정에 충실한 그가 있었다. 그 모습에서 그의 단순함과 간결함 그리고 명확한 그의 태도를 엿 볼 수 있었다. 김준용 작가는 ‘2018 로에베 크래프트 어워드’ 의 최종 30명의 작가에 선정되었다. 이 상은 2016년 이래, ‘루이뷔통 모에 헤네시 (Lois Vuitton Moet Hennessy)’ 산하 패션 브랜드인 로에베의 재단에서 수여하는 상으로써, 2018년 86개국 1,865명의 지원자 속에서 ‘Tears in the Sunset’ 이라는 작품으로 최종 30명의 엔트리에 당당히 선정되었다.
성장기: 시간을 담다 작가님의 성장기는 어떠했으며 예술적 기질이 그때부터 있었는가? 만드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반면에 그림은 정밀묘사나 세밀화는 잘했지만 수채화와 유화는 유독 힘들어했다. 좀 더 들여 보면 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일례로 낙엽을 그리면 모양을 그린 다음 채색은 한 색으로만 했다. 보통 작가들은 낙엽을 그리면 다양한 색을 사용하는 편이다. 빛이 반사되는 것도 있을 테고, 자연적으로 갖고 있는 색깔도 있을 테고…여러 가지 색을 써서 표현하려 하는데 나는 단순하게 한 색으로만 채색했다. 오히려 연필로 그리면 세밀하게 명도를 표현하는데 만에 뭔가 색은 약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를 지원을 할 때도 색을 많이 쓰는 학교보다 데생만 하는 학교를 지원하고….뭐든지 그렇게 나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을 찾아 갔다. 재능도 없는데. 대학교 전공은 ‘도자기’ 였는데 어떠한 연유로 유리로 전환되었는가? 당시 유리와 관련하여 유일하게 국민대에만 있었다. 대학교 3,4학년 때 전공 선택으로 들을 수 있었기에 그 전까지는 주로 도자기를 했다. 도자기도 참 좋아했다. 물성이 좋았다. 처음은 마치 흙장난 같아 싫어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할 것도 많고, 공부 해야 할 것도 많아서 좋았다. 하다 보니 빠지게 된 셈이다. 아마도 나는 파고 들 수 있는 요소와 기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던 중 1995년 1월, 우연한 기회로 호주 유리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닉 마운트’ (Nick Mount)의 워크샵에 참가 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도자기의 가능성도 보고 있었는데 워크샵을 계기로 블로잉을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도자기 같은 경우, 성형하고 다듬고 굽고 시유를 하고 또 굽고…이러한 긴 시간의 과정을 통해 내가 원하는 색을 뽑아내지 못하는 것에 반해, 유리는 보이는 순간 바로 작업 세팅을 하고 그 자리에서 모든 게 끝나는 간결함과 단순함이 좋았다.
유리의 만남: 유리를 담다 유리는 어떻게 만났는가? 유리는 고2때 이미 하려고 결정했다. 그쯤 하여 처음으로 한국에 유리라는 수업이 대학에 개설되던 시기였다. 정확히는 전공이 개설된 게 아니라 도예과에 유리 수업이 개설된 거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막연하게나마 유리가 하고 싶다고 느꼈다. 뭐가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유리라는 것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렇게 무작정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학교를 지원했다. 전공은 도예였지만 유리 수업이 있었기에 지원을 하게 된 거다. 그 다음에 유리를 더 발전시키기 위해 유학을 가게 되었다. 미술이 좋았다기 보다 만드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다.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면 표현의 폭이 큰 조소로 갈 수도 있었을텐데 왜 유리를 선택하였는가? 유리였기 때문이다. 조각을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유리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름이 유리 조각이었으면 유리 조각과로 갔었을 테고 유리 디자인 이였으면 거기로 갔었을 거다. 유리라는 재료를 이용하여 만드는 것이 좋았던 셈이다. 유리는 블로잉을 하여 성형을 하거나 붙인다는 이미지가 통상적인 것 같다. 그러나 작가님은 유리를 깎는 공정 과정이 있다. 지금의 공정 과정이 된 동기가 있는가? 경험이 중첩되면서 그렇게 된 것 같다. 만나는 사람들도, 작업의 방식도 다양했다. 만약에 내가 건축 유리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작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리에 있어서 깎는 조각의 방법을 알지 못했으니깐. 그리고 그때 만난 몇 명의 작가들로부터 이러한 영감을 받기도 했다. 그냥 유리 덩어리를 깎아서 작업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셈이다. 즉, 주조를 하지 않고 그냥 깎더라도 모양이 나오는 거다. 거기다 제작 과정이 너무 안정적이기도 했다. 덩어리를 깎으면 시간은 걸리지만 원하는 형태가 그대로 나온다. 그리고 내가 만들 수 있는 색깔을 만들 수 있었기에 이 공정 과정에 매료되었다.
색: 색을 담다“유리의 색은 빛에 의해 확장된다”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유리 못지 않게 색이 중요한 요소라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보면 색의 표현으로 인하여 유리를 하고 있다는 인상도 갖게 된다. 색의 매력은 무엇인가?
색의 조합. 그리는 색은 못한다. 그러나 만들어져 있는 색의 배합은 잘한다. 어찌 보면 콤비네이션을 좋아하는 것 같다. 학교가 조형대학교이다 보니 구도나 위치, 색상의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느낌을 배웠던 것 같다. 그래서 그쪽의 배합은 잘했다. 또 내가 생각한 색이 복잡한 공정 과정에서의 변수보다 내 능력 안에서 눈에 보이는 그대로 나온다는 성격이 유리의 매력적인 점이다. 운에 맡기는 것이 아닌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 도자기도 계속 기술을 쌓아 가면 원하는 색을 낼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변수의 수를 줄이는 것이 아닌 변수가 없는 과정에서의 색감이다. 물론 변수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지만 내가 만들고 싶은 색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것에 묘한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작업 초기 주로 샀던 색은 원색의 빨강, 노란, 주황이었다. 대학원에서 처음 샀던 색이 아마도 빨간색과 노란색이다. 막 현란하게 작업했다. 당시에는 원색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무척 강했다.
어떤 특정한 색인가, 아니면 색 그 자체의 다채로움인가? 유리에는 대략 300가지 정도의 색이 있다. 한 회사에 대략 120가지의 색이 있고. 투명과 불투명으로 또 나눠지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구매하는 내역을 보면 시기마다 달랐다. 어떤 시기는 불투명만 구입할 때가 있고, 또 어떤 시기는 투명만 구입할 때도 있다. 보통 구매의 주기가 1~2년인데 그때마다 좀 다르다. 작업의 시도에 따라 다양해지는 것 같다.
멈춤과 다름: 멈춤과 다름을 담다작가님의 시기 중, 2006년에서 2010년 사이에 잠시 휴식기가 있었다. 이때의 과정은 어땠는가? 휴식 이전까지는 평균 1년 단위로 작업의 성격이 바뀌었다. 시리즈를 만들고 전시회를 하면 싫증이 나서 다시 새로운 작업을 하고, 또 그 과정을 걸치면 다른 또 새로운 것을 하고. 지금 보면 그때의 시도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무작정 무엇이 좋다기보다 ‘나는 뭘까’ 라는 질문에 대한 갈구였던 것 같다. 그래서 옛날 작업들을 보면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까지 다 달랐다. “작업 스타일의 변화는 나를 찾아가는 갈구를 담고 있다”
물성의 수용은 있는 그대로의 수용 작가들의 연대기를 보면 가끔 중간에 쉬는 시간들이 있다. 긴 연대기에서 보면 매우 짧은 요양생활 혹은 여행으로 기술되지만 작가로써는 가장 심란한 시기이자 큰 변화기의 시기일거라는 상상해본다. 중간에 작업을 멈춘 이유는 무엇인가? 2006년 개인전을 마치고 그 작업으로 공예문화진흥위원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당첨되어 SOFA NY Fair (New York Sculpture Objects and Functional Art)에 참여하게 되었다. 가기 전에 너무 좋다. 도착해서 페어를 둘러 보는데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쭈욱 나열되어 있고 드디어 내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구나 하며 들떠있었다. 그렇게 페어를 돌아다닌 다음 자리로 돌아와 내 작업의 박스를 여는 순간 굉장히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에 만든 작업은 유리 같지 않은 유리를 만들었었다. 유리가 아닌 금속 같은 작업이었다. 그런데 왠지 사이즈 면에서도 작았고, 보여진다는 게 굉장히 창피하게 느껴졌었다. 당시의 내 작업은 컨셉도 명확하고, 기술적으로도 높았고, 새로운 테크닉이었고 남들과 다르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막상 보여지고 나니 사람들을 끌만한 게 없는 거였다. ‘잘 만들었네, 독특하네’에서 끝나버리는…나 같아도 갖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거다. 다른 작업들과 비교되니깐. 그때 많은 생각을 갖게 되면서 복잡해졌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뭘 해야 할지, 뭔가 잡히지가 않는 거다. 생각이 많아지니 작업이 안됐다. 그런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작업이 한국에서는 잘 팔렸다. 잠시 멈췄던 이유는 ‘아직 해외로 나가기에는 내 레벨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구나’ 하는 자괴감이 컸던 것 같다. 우리가 책이나 전시장에서 잘 알려진 작가들을 보면 ‘우와 멋있다’ 와 같은 감탄사가 나오는데 페어는 이러한 작가와 함께 내 작업도 나간다는 거다. 그러면 이 작가들은 더 이상 나의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이 되는 거다. 유명하고 잘 알려진 데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는데 나 또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야 거기서 경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냥 그룹전이나 순회전이였으면 크게 개의치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게 페어였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때 내 관점이 바뀌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 계기가 작업을 멈추게 된 큰 동기가 된 셈인가? 그렇게 페어가 끝나고 2006년에 작업실의 불을 껐다. 정확히는 블로잉을 하지 않았던 거다. 그 기간 동안 가마 제작도 하고 건축 유리를 주로 했다. 건축 유리라는 게 조형물을 만들고 조각하는 것이다. 그때의 경험을 살려 이후로도 2년에 한번은 개인전을 했다. 2008년에 개인전을 했을 때 유리판을 갈아서 빈 공간을 만들어 에폭시를 채워 넣는 기법을 사용하여 벽에 거는 작업을 했다. 전시회를 위한 작업이었지만 그때의 시도가 결론적으로 지금 작업으로 연결된 셈이다. 왜나면 그때의 기법이 연마를 했었고, 색이 있는 에폭시를 채워 넣는데 나중에 보니 색 유리를 갈면 되는 거였다. 그러니깐 굳이 블로잉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연마 기술을 배우고, 큰 덩어리를 다루는 걸 배우고, 깎는 걸 배웠다. 즉, 깎고 조각을 하며 연마 하는 걸.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렇게 하면 작업이 될까 했던 것이 2010년 작업이었다. 지금 내 유리작업의 발판인 셈이다. 결국 보면 예전에 나를 찾는 과정의 시도들이 하나씩 도와주는 요소들로 연결된 셈이다. 이 작업을 했었기에, 이 과정이 나오고 이 과정을 경험했기에 현재의 작업이 나오는 단순한 이치다.
생활과 일상: 일상을 담다 작업에 있어서 본인만의 프로세스가 있는가? 식사 시간은 꼭 지킨다 (웃음). 아침 식사 후, 작업실 물청소를 하고, 불을 키고, 밥 먹고 와서 오전 작업하고, 12-13시쯤 점심을 하고 오후에 한 2개 정도 작업을 더 한다. 그렇게 총 2-3개 정도 작품을 만든다. 작업이 완료되면 다시 유리를 투입하는데 그 시간이 대략 3-4시간정도 소요 된다. 이 작업은 다음 날을 위해 유리를 녹여야 하는 과정인데 유리가 녹으려면 가마의 온도를 올려야 하며 따로 가마가 있다. 다음을 위한 준비 과정인데 이 과정이 끝나면 대략 18~19:00가 된다. 이때 흐름이 좋다고 21시까지 하거나 그러면 다음날 무리가 온다. 작업은 짧은 호흡이 아니라 긴 호흡이기에 큰 맥락에서 흐름을 봐야 한다. 이 리듬감을 거스르면, 괜히 하나 더 만들었다가 다음날의 하루를 망치게 된다. 하루에 약 80키로를 녹이면 작업 2,3개 정도 분량이다. 딱 여기까지. 아침은 꼭 먹고, 콩나물국밥이나 우동 및 맥도날드의 맥모닝 등 특별히 가리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해장류가 많은 것 같다 (웃음). 작업이 끝나면 도와주는 어시스턴트들과 술을 거의 마신다. 약주니깐. 작업은 주로 겨울 1달 가량만 하는데 그때 도와주는 친구들과 벽제의 작업실에서 한 달 가까이 합숙을 한다. 지금 삶에서 풍부한 요소는 어떤 것이 있나요? 가족을 중요시 여긴다. 집에…집에 자주 가죠 (웃음) 술 먹고 집에는 꼭 가죠.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려 한다. 와이프는 이쪽과 다르게 불문과이고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다. “작업은 짧은 호흡이 아니라 긴 호흡의 흐름에서 움직인다”
생각: 생각을 담다 ‘담는다’는 표현을 자주 쓰시는 것 같다. ‘담는다’ 라는 표현 이외에도 많을텐데 왜 이 표현을 자주 쓰는가? 아마도 공예 기반에서 나오는 표현일거다. 내 작품을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어떤 용도로 쓰는가라는 질문이다. 대부분 장식용의 관상용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기(器)의 기능은 갖춰져 있다. 화병으로도 화채로도 담아 먹을 수 있다. ‘담는다’는 개념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거다. 장식용으로 대부분 쓰시지만 쓰자고 생각하시면 무엇으로라도 쓸 수 있다. 예전에 갤러리에서 내 작업을 뒤집으면 더 잘 팔릴 거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말하는 바는 담는 형태의 공예는 가격이 낮지만 뒤집어서 아트로 만들면 비싸게 팔린다는 취지였다. 맞는 말이기도 한데 나는 그게 싫었다. 공예는 공예의 본질이 있기에 쓸 수 있는 기능의 용도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업이라면 굳이 기(器)로서의 기능을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기(器)를 작업의 선택으로 하였다면 기로써의 순환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평면의 작업들은 현상은 표현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시각각 변화는 기(器)의 순환구조는 표현하기 어렵다. 입체이기에 돌면서 시시각각 변화는 모습은 기(器)이기에 표현 가능하다. 나의 생각, 느낌, 경험, 표현 등을 유리라는 기(器)로 담는 것이다. 작가님이 바라보는 자신의 작업 포인트는 무엇이라고 생각되나? 색과 콘트라스트인 것 같다. 유리에서 얇고 두꺼움의 표현 그리고 색. 앞서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내가 원하는 색을 낼 수 있어서 유리가 좋았다. 색에 대한 제한이 있는 걸 싫어한다. 금속이나 도자기에서 나오는 색은 제한적인 것에 반해 유리는 제한이 적은 편이다. 이 색은 비쳐지면서 빛과의 반응에서 나오는 색이다. 예전에는 유리에서 오는 물성을 무시했다면 지금은 누구보다도 그 물성을 수용하고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물성의 수용은 있는 그대로의 수용” 2010년 이전과 이후가 작가님에게 있어서 큰 분기점인 것 같다.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양산이었다. 예전은 가마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다. 기술적인 것을 재미 있어 했고 굉장히 테크니컬했다. 그러나 그 이후는 가마 밖을 나와 연마를 하기 시작한 것이 가장 큰 차이다. 예전에는 블로잉 작가라고 했다면 지금은 ‘연마 작가’라고 한다. 가장 큰 차이가 조각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다. 즉 유리를 조각하는 거다.
OUTRO작가라는 상(像)이 갖는 이미지라는 게 있게 마련이다. 괴짜거나, 상식을 벗어나거나, 복잡한 사고와 철학을 지며, 일상적이지 않는 삶을 영위해 갈 것 같은 그런 이미지 말이다. 이러한 통상적인 이미지의 작가도 있겠지만 김준용 작가는 그가 유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나, 유리 작업을 해 나갈 때, 그리고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할 정도로 명확한 간결성이 있다. 그리고 그 간결성은 처음 그가 작업 했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유리다. 오직 한 곬, 외도가 없는 유리다. 심플한 그의 삶의 태도가 기(器)에 담기면 그의 작업은 복잡성이 아닌 입체성으로 다채로워진다. 아니 컬러풀해진다. 우리는 그의 다채로움을 그저 눈에 잘 담으면 될 것 같다.